2019. 10.



도시 속 선 위에 발을 딛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연필로 그리며 드로잉의 속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종이와 연필선의 관계에  주목하며 2018년부터 흔적만 남은 드로잉을 구상했다. 흑연으로 화면을 메우지 않고 연필선을 지워서 궤적만 남은 드로잉을 떠올렸다. 그림을 그리면서 주저하고 흔들리는 생각의 경로를 기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고와 재난을 담은 보도 사진을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기 위해 사진과 영상을 보며 연필로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아이폰으로 SNS 뉴스 계정을 확인하며 위태로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손끝으로 넘기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하다. 지나칠 수 없는 보도 사진과 영상을 보고 그리고 지운 뒤 다시 그린다. 주저하지 않고 나아간 선과 머뭇거린 흔적이 남는다.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 흑연의 뼈대가 남아 그리는 과정을 돌아 볼 수 있다.

  현재 종이에 연필로 선을 긋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남은 흔적을 이용한 드로잉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중이다. 드로잉을 이용한 무빙이미지 <예술가로 사는 법>은 ‘예술가’라는 일은 무엇이며 나는 작가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단상을 적은 작업노트를 소재로 했다. 7분가량의 단채널 영상을 기준으로, 총 두세 장의 종이 위에 작업노트 속 글씨와 그림을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사진을 촬영해 이미지 소스를 마련한다. 영상의 지속시간 1초당 평균 7~8개의 프레임을 사용해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편집한다. 같은 방법으로 제작한 <고양이와 나>는 2020년에 8개월 동안 경상남도 산청군에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만난 한 고양이와의 만남을 토대로 했다.

  드로잉에 주목하는 이유는 지금을 통과하며 겪고 있는 문제를 종이 위에 남겨서 기록하려는 동기에서 비롯한다. 연필은 종이 위에서 우연의 효과를 만들지 않기 때문에 그리는 순간의 태도를 투명하게 드러낸다. 내가 바라보는 도시 풍경과 보도 사진, 나는 작가가 될 수 있는지, 그때 만난 고양이는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에 관한 단상을 연필로 그리고 기록한 후 되돌아보며 내가 어떤 고민과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왔는지 더듬어 본다. 생각이 흘러가는 과정과 움직임이 종이 위에 연필선을 긋고 지우기를 반복하고 남은 궤적으로 드러난다. 종이의 공백과 흑연 자국 사이, 지우고 남은 연필선의 흔적에 관심을 기울인다.